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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23~080222
폭력과 상스러움/진중권/푸른숲 - 하지만 대화란 투명한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성적 대화 뒤엔 늘 끈적끈적한 물질적 '이해'와 뭉클뭉클한 '힘'이 숨어있다. '힘' 없는'대화'는 공허하다. 소렐은 옳다. 하지만 '대화'없는 '힘'은 맹목적이다. 그래서 소렐은 틀렸다.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다. 그래서 난 벌거벗은 '힘'의 원시적 충돌을 이성적 '대화'로 바꾸는 기제로써 의회주의를 옹호한다. 하지만 '대화'를 위해 '힘'을 거세하는 데엔 반대한다. 왜? 거세당한 자는 '대화'상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힘'없는 자와 진지하게 대화를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노조는 있어야 한다. 국가라는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는 '힘'으로 남아야 한다. 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p.39) -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과 가족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보수주의이나, 그 가치를 너무 중시하다가 성원의 개별성까지 지워버리는 가족주의는 분명히 전근대적 현상이다.(p.50) - '이타적 자살.' 이는 타인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과연 그럴까? <죽음의 분량>이란 짧은 글에서 미시마는 말한다. '사람들은 핵전쟁 같으 ㄴ대량 살육을 두려워한다. 하지마 ㄴ죽음의 분량에 겁먹을 거 없다. 왜? 결국은 저마다 제 몫의 죽음만 죽으면 되니까.' 오, Jemeinigkeit(저마다 자기 몫의 삶)! 여기서 대량 살육은 간단히 개별적 죽음으로 환원된다. 말하자면 핵폭탄이 터져 인류가 종말을 맞으나, 내가 우연히 교통사고로 죽으나, 죽는 나의 관점에서는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발상을 뒤집으면 나 하나의 죽음을 대가로 대량 살육을 살 수도 있다는 테러리스트이 미학이 등장한다. 제 목숨이 가벼운 자에게는 남의 목숨도 가벼운 법.(p.54) - jemeinigkeit : 각자성 - 모든 "희생"이 "진리"를 세우는 건 아니다. 어떤 이가 희생을 했다는 사실에서 그 희생이 대변하는 이념의 정당성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변태적 유미주의, 미적 형식주의의 극단일 뿐이다. 오직 인간으로부터 자립한 압제적 권련에 '대항'하는 희생, 허구적 이념과 주관적 드라마를 '탈극화'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냉철한 희생, 집단이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희생. 이런 희생만이 진리를 세울 수 있다. 전태일의 희생이 값진 건 그 때문이다.(p.59) - 모든 "진리"가 "희생"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p.59) - 정치적 자살의 '숭고함'은, 어떤 옳은 대의의 실현을 위해 한 개인이 자기에게 자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유미주의는 대의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종종 생략하고 한 개인이 목숨을 버리는 드라마의 미적 효과만을 고려한다.(p.69) - 진짜 자유주의자라면, '자유'라는 말로 경제적 자유 이상의 것을 의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교양이다. 또 시장을 만능 '해결'로 보는 수준을 넘어 동시에 그것을 '문제'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평등을 자유와 대립시켜놓고 '골라, 골라' 야바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등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현대적 자유주의의 수준이다.(p.92) - 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들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여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야 한다.(p.97) - 에토스 : 일반적으로 민족적 ·사회적인 관습을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이 말에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주어졌다. 인간이 가지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항상 상반하는 방향을 내포하고 있으나 동일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한 방향으로만 지향하는 습관이 양성된다. 이 습관이 에토스이며 이 에토스에 의하여 영혼의 선악의 성격도 자란다. 에토스는 지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일시적인 특성을 가진 파토스와 대립된다.(네이버 백과사전) - 가령 생명 공동체, 환경 공동체처럼 생태적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 그리고 모든 것을 동질화하려는 거대 사회의 폭력에 맞서 게이 공동체, 히피 공동체, 페미니즘 공동체 등 '소수자의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든, 생태 공동체든, 소수자 공동체든, 이런 미시적 공동체의 건설이 거대 산업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게 해줄 거시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하지만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꾸며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는 이 작은 움직임들은 결코 사소하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장기적으로 이 거대한 산업 사회를 지금보다 덜 폭력적인 형태로 바꾸는 데 필요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p.124) - 아직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사회 일반이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광신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p.162) -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행한 사람을 죄인이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p.167) - 동성애를 "비정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때의 "비정상"이란 '통계학적 비정상'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의학계의 견해다. 말하자면 동성애자는 다만 통계학적 소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이한 성향, 취향, 견해를 가진 사람을 함부로 "비정상"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를 "비정상"이라 부를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들을 "비정상"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동성애를 차별하는 언행이라 할 수 있다.(p.173) - 이제까지 이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해왔다면, 이제 이 '차이'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잠재력을 밝혀내야 한다.(p.175) - 근대적 독단을 무덤으로 보내고, 모든 것을 전체화하는 근대의 편집증적 보편주의를 매장하라는 얘기, 그리하여 그 무덤에서 이념적 겸손함(허튼 겸손 떨라는 얘기 아니다)을 가진 지식인, 개별 상황에 기민하게 개입하는 지식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책임감"을 가진 지식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얘기다.(p.191) - 공포. 그것은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유일한 정의는 생존이고, 그 생존을 위해 그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p.198) - 친일을 하다가 반공주의자로 돌변한 군사 독재자들의 일본제 '국가주의'와, 이들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테크노크라트로 복무하여 개인적으로 출세했던 미국 유학파들의 천박한 미국제 '자유주의'. 일본식 국가주의와 미국식 자유주의의 결합.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우리 교육의 문제도 근복적으로 바로 이 권력 구성에서 비롯된다.(p.226) - 테크노크라트 : 기술관료라고 한다. 과학과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과학자·기술자·경제학자 등 전문적 기술자가 사회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 한 민족이 문화적 정체성을 갖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몇푼의 효율성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을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문화에 대한 테러다.(p.260) - 실제로 잡글은 촉각적이다. 그것은 대중을 자극한다. 그것은 대중의 몸에 직접 기입된다. 바로 거기에 잡글의 유뮬론적 성격이 있다. 가끔은 논리적 설득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아니, 더 이상 논리적 설득의 문제가 아닌 적나라한 힘의 표출을 볼 때가 있다. 이 힘을 받아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역시 대중의 신체에 직접 다가갈 힘을 가진 글쓰기, 바로 잡글이다. 잡글은 쇼크를 주어 대중의 몸을 변화시킨다. 잡글은 대중과 함께 웃으며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하는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이 축제 속에서 대중의 몸은 거듭난다.(p.295)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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